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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에게 격산덕해의 모범을 보여주신 어르신

  • 조회 1703
  • 2014.10.13 11:12
방지일 목사님 별세 추념글
▲김영한(샬롬나비 대표/기독교학술원장/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한국교회의 산 증인이자, ‘영원한 현역’이란 별명을 가진 고 방지일 목사께서 10월 10일 향년 103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는 1911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목사(방효원)의 아들로 태어났고, 선천 신성중학교와 평양 숭실대에서 조지 멕퀸 선교사에게서, 그리고 장로회신학대에서 전설적인 마포삼열(사무엘 마펫) 선교사에게서 보수정통신앙을 배웠다.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30년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20대 젊은 전도사로서 평양대부흥(1907년)의 주역 길선주 목사를 모셨다. 21년간 중국 산둥성 일대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셨다. 그는 영등포교회에서 시무하셨고, 예장 통합 교단의 총회장과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셨다.
방지일 목사는 복음에 대한 열정, 주님 앞에서의 ‘내려놓음’과 ‘비움’의 삶을 늘 실천하셨다. 그는 또한 백 세 넘는 노령에도 이메일을 여시고 응답하시는 등 소통에 힘쓰셨고, 한국교회에 대한 애정 어린 가르침과 충고도 아끼지 않으셨다. 방지일 목사의 이러한 삶은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손양원, 한경직, 박윤선 목사와 함께 한국교회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로 인정받고 있다.
필자는 숭실대 교수(기독교학대학원)로서 34년 동안 봉직하면서, 평양 숭실전문(대) 출신이신 그분을 교계 원로로서 크게 존경하여 그분과 개인적 친분관계를 맺었다. 그분을 필자가 봉직 20년 만에 설립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채플에 자주 모셨던 추억을 가지고 있으며, 퇴임 이후 기독교학술원 고문으로 모셨고, 그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신 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서 그분을 교계 원로로서 잘 받들어 모신 김명혁 목사와 함께 그분을 자주 뵈옵던 한 사람으로서, 그분에 대해 다음같이 추념해본다.
1. 선교사의 참 모습을 보이신 분
방지일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시절에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1933~37년 시무하면서, 한국교회 최초 목사 7명 중 한 명인 길선주 목사와 동역했다. 평양대부흥의 주역 길선주 목사는 당시 원로목사였으며, 방 목사는 앞을 잘 보지 못하는 길 목사의 손을 잡고 집회를 다니기도 했다. 신학교를 마친 뒤에는 1957년까지 공산권 치하의 중국 산둥성 일대에서 21년간 선교사로서 활동했다. 당시 일본은 대동아선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가입을 강요했는데, 방 목사는 이를 거절했다.
이분은 중국 선교사 시절 두 가지를 지키신 분이다. 첫째,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운영하는 어용단체인 대동아선교회에 가입하는 것을 거절하시고 순수 복음활동을 하셨다는 것이다. 조국이 일제에 의하여 식민지가 되었는데, 이분은 일제의 군국주의에 타협하여 편하게 복음을 전한다는 입장이 아니라 민족적 애국심을 지키셨다는 것이다. 둘째, 어려운 시대적 형편 가운데도 추방될 때까지 목자로서 중국인 신자들과 교포 난민들을 양처럼 돌본 참 목자였다는 것이다. 방지일 목사는 1937년부터 중국에서 사역하면서, 다섯 번의 정변으로 인해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중국인 난민 뿐 아니라 한인 교포 난민까지 돌보면서 수천 명이나 되는 난민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결국 공산당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자 본국 총회에서도 철수 지시를 내리고, 미국영사관에서도 마지막 철수하는 배에 탑승할 것을 간곡히 권유했으나, 방 목사는 중국 현지에 남았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북한으로 추방될 위기에 처했으나, 서방 언론을 통해 최후까지 남은 기독교 선교사로 소개되신 분이다. 방 목사는 서양 선교사들이 추방된, 어려운 공산당 치하에서도 중국인 신자들 곁에서 저들의 신앙을 돌보면서 어려움을 함께하였던 것이다. 이는 영들을 사랑하는 진정한 목자상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선교사역에서 그가 배우고 본받은 초창기 한국선교사들, 사무엘 마펫, 윌리엄 베어드, 조지 맥큔 등 선교지 조선에 와서 그 생을 마감하기까지 헌신한 선교사들의 위대한 정신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평양 숭실대를 세운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배위량) 박사는 그의 부인과 함께 20대 청춘으로 미지의 땅 조선에 와서, 기독교 신자가 많은 서북지역의 중심지 평양에 숭실학당(1897년)을 세우고 지역교회를 개척하면서 숭실학당을 한국 최초의 4년제 대학으로 만들고 교육으로 조선을 복음화하는 데 한평생을 바친 한 알의 밀알이 되신 것이다.
2. 참 목자의 모습을 보이신 분
방지일 목사는 1979년 은퇴한 뒤부터 1년 가운데 절반 정도는 국내외 집회와 세미나 등을 통해 복음 전파에 앞장섰다. 설교 요청이 들어오면 사양하지 않았고, 기고를 부탁받으면 직접 썼다. ‘(하나님께) 받은 대로 전달하라’는 그의 목회지론에 따라, “복음을 위해서라면 힘이 남아 있는 한 어디든지 달려가겠다”는 약속을 지켜낸 것이다.
방지일 목사는 평생 ‘오직 성경’ 그리고 ‘기도’를 강조한 복음주의 신앙이었다. 그는 “20대 때 모셨던 길선주 원로목사님은 부흥회 때 꼭 성경공부를 중심에 놓았다. 그런데 1957년 중국서 귀국해 보니 성경공부는 사라지고 ‘심령부흥회’가 됐더라”며 감성에 치우치는 부흥을 경계했다. 진정한 부흥은 진지한 성경공부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는 죄를 찾는 현미경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 병원이 필요 없듯이 죄 없는 사람은 안 믿어도 되는데, 깊이 생각해 보면 ‘나는 죄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영으로 들어갔다가 육으로 나오기 쉬워요. 그러지 않으려면 매일 잘못한 것을 자복해야 합니다. 기도는 죄 찾는 행위예요. 보통 눈으로 안 보이는 죄도 어제는 500배 현미경으로 보고, 내일은 5000배 현미경으로 보면 찾아져요. 나는 하나님 앞에 머리 숙이면 잘못한 것만 생각나요.”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다 보면 현미경의 렌즈가 맑아지면서 평소엔 보이지 않던 작은 죄도 찾아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방지일 목사는 교회는 영으로 봉사해야 한다고 가르치시고 보여주셨다. “일제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감옥에서 돌아가신 주기철(1897~1944) 목사님입니다. 설교는 영어로 ‘메시지(message)’, 즉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주 목사님은 하나님 말씀 전하는 일에 충실했어요. 교회는 육(肉)으로는 못하고 영(靈)으로 하는 것입니다. 헌금 많이 하고 이름 나는 것을 얻겠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예요. 장사꾼이지.” 그가 교회가 사회봉사하는 가운데서도 구령(救靈)복음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거듭 말씀하신 것이 기억난다. “봉사, 그거이 믿지 않는 사람도 하는 거잖아. 믿는 사람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디. 요즘 목회는 ‘은과 금은 있으나 예수는 없어서 못 준다’ 이거 아닌가 싶어… ‘예수는 내 구주시다’, 속죄구령을 전해야디! 다른 거는 자선사업이야.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이야.”
3. 신앙인, 특히 목회자의 인격의 모범이 되신 분
방지일 목사는 말씀과 기도의 균형이 있는 신앙을 중시하는 목회자였다.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와 침례교 등 교파를 가리지 않고 교계에서 방 목사를 찾았던 이유는, 치우침 없는 신앙과 포용하는 마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길다란 시험관과 같은 신앙은 깊이는 있으나 넓지 못합니다. 반면 대접과 같은 신앙은 폭넓게 수용하는 듯하지만 깊지 않아요. 우리 모두 깊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넓어지도록 노력합시다. 좁고 얕다고 불평하지 말고 깊어지도록 애씁시다.”
방지일 목사의 거실에는 ‘격산덕해(格山德海)’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가 이 액자를 걸어 놓은 이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시는 것에서, 그분의 고매한 인격을 엿볼 수 있다. “88세 생일 때 어떤 사람이 ‘수산복해(壽山福海)’라는 글씨를 선물로 줬어요. 내가 말했어요. ‘오래 살면 뭐 할 건데? 복 받으면 뭐 할 건데? 인격이 산처럼 높고 덕이 바다처럼 넓어야 하지 않아?’ 그래서 다시 써 달라고 했어요. 덕이란 남에게 베푸는 것이에요.” 그분은 ‘壽比南山 福之如海(壽山福海)’ “남산처럼 오래 살고 바다처럼 복을 누리라”는 의미의 “수산복해”(명은 산처럼 복은 바다처럼)를 거부하고, 格比南山 德之如海(格山德海)'라고. “인격을 산 같이, 덕을 바다 같이 쌓으라”는 의미의 “격산덕해”(인격은 산처럼 덕은 바다처럼)를 추구하시면서 사신 것이다. “격산덕해”(格山德海) 하면 “수산복해”(壽山福海)는 따라오는 것을 그분의 생애가 교훈해주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문제는 “수산복해”를 먼저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교회의 양적 성장만이 복이요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주변의 작은 교회를 배려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데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대형교회의 공룡 현상, 대형교회 목회자의 대기업체 회장 현상, 85% 한국교회의 미자립화 현상 등)이 야기된 것이다.
4. 영성이란 “내가 없어지는 것”이다.
필자가 올해 10월에 출판할 저서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본 영적 분별』 (킹덤북스, 2014)에 관한 저서에 대한 추천서를 그분에게 부탁했는데 제일 먼저 보내오셨다. 제목은 “‘나’란 이것이 없어지면서야 영의 역사가 시작됨이라”(방지일, 2014년 3월 17일).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영한 목사님, 꾸준하게 연구 연마하심을 바라봅니다. 저는 목사님의 연구하시는 그 분야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본 영적 분별』에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영적 분별에 대한 10가지의 제의하심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분이 생각하시는 “올바른 영성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마태복음 17장 24절, 요한복음 14장 26절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피력하셨다. “주님이 친히 주신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7:24). 자신을 否認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는 자신을 버린 그 실정입니다. 주님은 내 대신 죽으심으로 代續 求續 續罪 로 내 赦罪함을 받게 하심이라, 주신 복음 받기만 하면 되게 해주셨습니다. 이도 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영으로 주심을 영으로 받을 뿐임을 이렇게 명시하여 주신 말씀이라. 내 지능 내 감정 내 의지가 완전 제거되는 그 일을 지로(指路)하심이라.”
방지일 목사는 사도행전 18장 5절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영의 일에 관하여 설명하신다. “바울이 무슨 일로 인하여 자기 믿음의 아들  디모데와 실라를 부른 실정이 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니아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행 18:5).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에게 밝히 증거하심이라.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는 일이 보혜사 영의 하시는 일이시라. 여기 내 무엇이든지 가입하면 벌써 내 일이 될지언정 영의 역사는 아니라. ‘나’란 이것이 없어지면서야 영의 역사가 시작됨이라. 신앙생활에 있어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내가 거기 있으면 이는 아닙니다. 나는 빠져야 영의 역사가 바로 드러납니다. 어떤 일에 플러스나 이는 자신의 일이요, 어떤 일에든지 내가 마이너스 되면 영의 역사가 분명해지는 실정을 80여 년간 주의 역사를 감당하면서 당해온 바를 잘 표현하는 능도 없는 자로서 한 마디 드려봅니다. 사도 바울 같은 그 충성한 종이 말씀에 붙잡혀서야 ‘예수를 그리스도라’ 밝혔다는 이 실정을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방지일 목사의 영성에 관한 짧은 메시지 “‘나’란 이것이 없어지면서야 영의 역사가 시작됨이라”는 어느 학자들의 말보다 귀한 금언(金言)이라고 생각한다. 이 분은 중국 산둥성 선교사로 21년간 지냈고 중국공산당에 의하여 추방당하신 후 귀국하여 영등포교회에서 23년 봉직하시고, 그 후 교계의  연합운동과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 활동에 일평생을 바치신 분이시다. 이러한 영적 거장의 체험에서 나온 영성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5. 한국교회 영적 지도자로 귀감이 되신 분
2008년 9월 방지일 목사는 제주도에서 열린, 예장합동·예장통합·기장·예장합신 등 장로교 4개 교단이 오랜 분열 끝에 한 자리에 모여 제주도 선교 100주년을 기념한 예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37년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만 해도 장로교가 하나였다”며 “1959년 당시 예장이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될 때 우체국에서 사방으로 전화해 말리며 마음 아파했던 기억이 난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주의 일에 “나”를 개입시키지 말고 제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믿음이란 투항인데, 아직도 우리는 내 주관과 경험으로 무장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가 보혜사 성령께서 인도하심으로 무장을 완전히 해제할 때 비로소 주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어요” 내려놓고 스스로 낮아짐으로 하나가 되자고 호소한 그는, 지난 7월 급기야 스스로에게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한국교회와 목회자 갱신을 위한 회초리 기도대성회’를 앞두고 “나부터 회개해야 한다”며 행사 포스터를 찍으면서 바지를 걷은 채 손에 든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내리 친 것이다.
방지일 목사가 기독교학술원 고문으로서 설교하실 때 기독교 영성과 관련하여 “내가 죽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말씀이 항상 떠오른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에게 가르쳐준 철저한 가르침이었다. 청교도의 존 오웬이라는 사람도 철두철미하게 내가 죽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한국교회의 문제란 목회자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들 개인의 인간적 욕망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연합기관의 문제점도 기독교가 잘 되니까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교파도 나뉜다. 목회자 자신의 인간적인 욕심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방지일 목사의 말씀은 오늘날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된 한국교회, 특히 목회자들에 대하여 주시는 귀한 교훈의 말씀이다.
6. 천수를 다하시면서 일하다 가신 분
방지일 목사의 건강 비결은 “닳아서 죽을지언정 녹이 나서 죽지 않겠다”는 부지런하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일과는 매일 새벽 3시부터 시작됐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글을 썼다.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다리 근력 운동을 하며 찬송을 불렀다. 이어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 인터넷으로 해외 선교사들과 후배 목회자들과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교제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그가 매주 가르쳤던 ‘월요성경공부’는 1958년부터 55년 이상 이어졌고, 제자들만 2,000명 넘게 교계에 포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하루 일정을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새벽 5시쯤 목욕하고 이메일 체크하고, 누가 어디 가자고 하면 가요. 운동은 젊었을 때 여의도에서 영등포교회까지 왕복 6㎞ 걷는 게 전부였어요. 지금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목회자 20여명과 성경공부하고, 주일에는 이곳저곳 설교하러 가요. 2월 말까지 일정이 꽉 찼어요. 닳아서 죽을지언정 녹이 나서 죽지 않겠다는 게 내 좌우명이에요.” “녹스는 게 두렵지 닳아 없어지는 건 두렵지 않다.” 필자는 그분이 부흥회를 인도하러 매해 미국행 비행기를 타시고 백 세가 넘어서도 동서남북 어디나 가시는 것을 보면서, 이분이 천수를 다하신 것은 타고난 건강이기도 하거니와 항상 복음 전파를 위하여 부지런히 최선을 다하시는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맺음말
방지일 목사의 소천 기별을 받고 슬픔과 애통함에 잠기기보다 한국교회에 이런 훌륭한 영적 지도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크다. 한경직 목사 소천 이후 홀로 남은 영적 어르신으로서, 목회자들이 많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 그분은 내려놓음과 비움의 자세로 후배 목회자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을 그의 삶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방 목사께서 한국교회에 남긴, 보석 같이 빛나는 발자취가 헛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남아 있는 우리 세대의 과제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초창기의 선구자 위상에서 퇴락하여 사회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 모두 그분의 소천을 계기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되찾는 건강한 한국교회가 되어 한국사회를 선진사회로 이끄는 견인차의 역할을 다하는 한국교회의 위상을 되찾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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